해 지는 쪽의 심심한 저녁
노을이 골목을 덮고 불이 하나씩 켜지는 동안, 천천히 걷고 잠깐 머무는 하루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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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어스름 골목 초입
혼자 나온 초저녁 할 일 없는 걸음이 골목 어귀에서 먼저 멈춘다 카페 유리 너머 따뜻한 조명 나무 그림자 아래 화분 하나 어깨의 가방이 자꾸 흔들린다 멀리 남산 타워가 주황빛 하늘에 작게 걸려 있다 가로등이 차례로 눈을 뜨고 발끝은 어디로 갈지 모른 채 그냥 한 걸음 더 빈손은 주머니에 넣고 목도리 끝이 바람에 긴다
02 창가에서 해 지는 쪽
유리창에 기대니 도시가 천천히 붉어진다. 식어 가는 커피 옆에는 펼쳐 둔 노트가 있고, 아직 아무 글자도 옮겨 적지 못했다. 뒤편에서는 누군가 조용히 앉아 있고, 나는 그 소리를 배경처럼 듣는다. 해는 강 너머로 내려가고 불빛은 하나씩 켜진다. 생각은 자꾸 창밖으로 흘러가고, 오늘의 심심함도 노을 속에 조금씩 녹는다.
03 김이 오르는 한 잔
따뜻한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면 손끝부터 천천히 풀린다. 김이 창가로 올라가 노을과 섞이고, 그 너머 골목들이 낮게 엎드려 있다. 옆에 놓인 물 한 잔은 아직 줄지 않았다. 펜은 노트 위에 가로로 누워 기다린다. 아무 말도 쓰지 않아도 괜찮은 저녁이다. 잔이 식기 전까지만 이 자리에 머물러 본다.
04 펜을 내려놓은 저녁
펜은 노트 위에 놓였지만 손은 아직 턱에 머문다. 흰 종이에는 채우지 못한 문장들이 여백처럼 남아 있다. 옆 접시의 케이크는 절반쯤 비었고, 촛불은 낮은 목소리로 흔들린다. 창밖에는 불빛이 많아지고 하루가 저물어 간다. 무엇을 적어야 할지 모르는 밤도 있다. 그래도 지금은 이 조용함이 충분하다.
05 밤이 내려앉는 길가
창가 커피는 식기 전에 한 모금 남겨져 있다. 유리 너머로 길이 길게 누워 있고, 가로등 불빛이 나무 사이로 떨어진다. 차들은 천천히 제 자리를 찾아 멈추고 사람들의 걸음도 점점 느려진다. 남산 쪽에서는 타워의 불빛이 하늘을 조금씩 밝힌다. 낯선 동네의 밤이 이렇게 가까이 들어온다.
06 비어 있는 자리의 온기
사람이 떠난 자리에도 온기는 조금 남는다. 의자에 걸쳐 둔 담요가 그 온기를 아직 지키고 있다. 나무 테이블 위 노트는 닫힌 채로 놓여 있고, 커피잔은 반쯤 식어 간다. 창 너머에는 타워가 노을을 등지고 서 있다. 나는 이 자리를 한 번 더 눈에 담아 둔다.
07 낙엽 깔린 남산 골목
나뭇잎이 바닥에 얇게 깔려 발걸음마다 가볍게 흩어진다. 돌담 위 등불은 골목의 끝까지 길을 비춘다. 카페 진열창 안은 아직 따뜻하고, 문 앞 벤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비어 있다. 저 멀리 남산 위 타워가 노을을 받아 선명하다. 천천히 걸어 내려가며 오늘의 하루를 마무리한다.
에필로그
심심한 발걸음으로 걷던 하루가 노을과 불빛 속에서 천천히 가라앉는다 이 저녁의 조용함이면 충분하다